부천군 문학면은 문학산(文鶴山) 중심으로 형성된 행정구역으로 문학리, 학익리, 관교리, 연수리, 동춘리, 옥련리, 도장리, 승기리, 청학리 등 9개리로 이루어졌습니다. 학익, 관교, 연수, 동춘 등의 지명들은 지금도 이용되고 있어 익숙하며 내륙 깊숙이 위치하고 있지만 이 당시에만 해도 거의 모든 지역이 바다와 바로 맞닿아 있었습니다.

 

부천군 문학면 지도
부천군 문학면 지도

 

문학면은 191441(조선총독부령 제111-19131229일 공포)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천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194041일 조선총독부령 제40(1940328일 공포)에 의해 다주면, 부내면, 서곶면과 함께 인천부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문학면에는 어떠한 역사가 있을까요?

 

첫 번째, 산본유삼랑(山本唯三郞)과 동양척식회사

산본유삼랑(山本唯三郞)은 대정 7, 19185월 조선총독부(조선총독부 관보 제1726)로부터 부천군 서곶면과 김포군 대곶면 등에 걸쳐있는 지역의 미간지 대부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사천 정보(四千町步)의 개간”(191872일 매일신보)이라는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땅을 개척하고 관개 수로를 설치하여 논 1만 정보를 만드는 사업으로 경비는 205만 원이 투자될 대형 사업으로 대정 15년에 완성되는 9년 계획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산본유삼랑(山本唯三郞)은 이외에도 1912년에 설립된 함흥탄광철도()의 대주주로 그리고 19195월에 설립된 조선전기흥업(본점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면 선교리)의 이사를 역임하였습니다. 함흥탄광철도는 자본금이 60만원, 조선전기흥업은 자본금이 1천만 원이 되었는데 요즘으로 보면 거대 자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의 거대 자본이 우리나라를 장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자본을 통해 조선을 수탈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사천 정보의 개간 기사
사천 정보의 개간 기사

 

두 번째, 화약 실은 배의 침몰

삼정물산회사 배는 화약 450 궤와 연기 없는 화약 네 궤 그리고 도화선 백 궤를 실어 문학면 옥련리에 있는 화약고에 운행하려고 했는데 거센 바람으로 인해 배가 바위와 충돌하여 침몰하게 됩니다. (1920112일 매일신보) 이로 인해 경무국에서 기사를 보내 상황을 파악해보니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 피해액은 1만 원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1920116일 매일신보)

 

세 번째, 부천 모범촌 건설

일제는 경기도 감독하에 부천군 문학면 관청과 관교 두 마을을 모범촌으로 계획하였습니다. 모범촌 사업의 핵심 역할을 맡은 기관은 부민회였는데 부민회의 발회식을 거행하고 문학면 김두현 씨를 회장으로 하여 총 10가지의 사업 목표를 설정하였습니다. (1924226일 매일신보) 부민회 회장이었던 김두현 씨는 1919~1929까지 문학면장을 하였습니다.

그 구체적 사업 내용은 농기에는 간식을 폐할 일, 잠업강습생을 양성할 일, 공동 상원(桑園)을 설치할 일, 식수를 힘써 행할 일, 연못에 연꽃을 심을 일, 오는 추석부터 남녀야학을 실시할 일, 관청 명령을 바르게 지킬 일, 농한기에는 부업을 장려할 일, 관혼상제의 쓸데없는 비용을 살필 일, 미신행위를 폐할 일 등이었습니다. 특히 농부간 식사 폐지가 모범적인 사업으로 소개될 정도였습니다. (19241120일 매일신보)

부천 모범촌 제1년의 사업
부천 모범촌 제1년의 사업

 

네 번째, 인천개항 공로자 정지용 씨 기념비 제막식

인천개항의 공로자 정지용 씨 기념비 제막식 기사
인천개항의 공로자 정지용 씨 기념비 제막식 기사

 

정지용(鄭志鎔)은 인천 부사(仁川府使)를 지낸 사람으로 1882723일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대 군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 세력인 민 씨, 별기군과 개화 세력의 후원역할을 했던 일본공사관을 공격합니다. 일본공사인 하나부사(花房義質)와 공사관 직원들은 서울에서 인천으로 피신을 하게 되고 인천 부사였던 정지용은 이들의 피신을 도와줍니다. 하지만 정지용은 188285일 한성좌윤으로 제수되는 그날 자살을 합니다. 승진되는 날 자살을 했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2022715일 기호일보)

아무튼 이러한 인연이었을까요? 일제는 50여 년이 지난 한참 후에 정지용의 기념비를 만들고 제막식을 진행합니다. 부천군민 100여 명을 비롯해 허섭 부천군수 등 고위직 관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19331120일 조선신문)

 

다섯 번째, 면장들의 행적

<역대 문학면장>

1

2

3

1919~1929

1930~1932

1933~1939

김두현

(金斗鉉)

김창진

(金昌鎭)

이중돈

(李重敦)

 

1) 김두현

1933년에 문학관내에서 국방비 헌금을 모금하는데 이중돈은 3, 김두현은 2원 냈습니다. (1933113일 조선신문)

2) 김창진

419일 진행된 주안금융조합 총회에서 평의원으로 당선됩니다. (1932423일 매일신보)

기원가절을 맞이하여 경기도의 공로자 표창을 받는데 김창진은 부민회장 자격으로 받습니다. (1931211일 조선신문) (1931213일 매일신보)

3) 이중돈

이중돈은 부천유도회 결성에서 부회장을 역임합니다. 부천유도회는 황도정신의 거양과 국가총력 발휘를 위해 조직되었습니다. (19391217일 매일신보) 해방 후에는 인천송도어업조합 이사에 취임했습니다.

문학관내 국방비 헌금 기사
문학관내 국방비 헌금 기사

 

| 박종선(민족문제연구소부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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